함부로 체질을 이야기하지 말자

  요즘은 어느 서점에나 건강 서적 코너에 <체질> 운운하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는데 이런 현상을 보면 나는 왠지 걱정이 앞선다. 왜냐하면 체질의학 활용의 첫 관문이자 대전제인 정확한 체질감별의 어려움과 어설픈 체질감별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글자 그대로 <뼈저리게> 체험해 봤기 때문이다.

  나는 8체질론에 의하면 토양체질이고 사상의학에 의한다면 소양인이다. 그러나 나는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3년간을 원래 체질과는 정반대인 수음체질 혹은 소음인인 줄 알고 그에 맞춰 생활하고 치료도 받았다. 지난 13년간 일곱 명의 한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여섯 명은 모두 수음체질 또는 소음인으로 판정하고 인삼 등이 들어간 약재로 치료하였고 마지막에 만난 배철환 박사만이 토양체질로 판정하고 체질침 중심으로 치료하였다. 앞서 받은 치료들은 나의 병세를 더욱 악화 시켰던 반면 마지막 치료가 나를 기사회생시켰음은 물론이다.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것도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13년간이나 잘못된 체질감별의 늪에 빠져 통해서받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여 제대로 된 8체질의학에 의해 회생하게 되었나 하는 이야기이다.

  나의 건강은 고등학교 1학년(1979년) 때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학교 시험기간 동안에는 하루에 2,3시간만 자고도 일주일 이상은 거뜬히 버티었고, 시험이 끝나는 날엔 곧바로 친구들과 탁구장에 갈 정도의 체력이었다.

  체육시간에도 반장이었던 나는 큰 소리로 구령을 붙이면서 급우들을 이끌고 운동장 서너 바퀴는 쉽게 뛰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10Km단축 마라톤 대회에서도 완주는 물론 전교생 중 상위5% 이내의 등위로 골인했다.

  그러다가 처음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고등학교를 1학년만 3개월 다니다가 자퇴한 후에 혼자 공부하면서부터 였다.(자퇴 이유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 적지 않겠습니다.)

  불규칙한 식사 때문이었는지 십이지장궤양이 1980년에 생겼다. 일년 가량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소화기능에 자신이 없어져서 음식에 주의하며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수험생활을 했다.

  그 후 1981년 11월 학력고사를 거쳐 1982년 3월에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식 후 수험기간 동안 지친 몸도 보할 겸해서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 K씨가 운영하는 Y의원이었다. K씨는 체질론에 따라 치료하시는 분이었는데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고 변이 시원하지 못하다고 말씀드리자, K씨는 잠시 진찰해 보시더니 내 체질은 수음체질이라고 하였다. 체질감별에 3분도 안 걸리고 <척 보면 압니다>식이었다. 이후에 내가 만났던 모든 한의사들도 이런 식으로 체질을 감별했다. 닷새를 두고 체질침 테스트까지 해서 체질을 감별하는 배철환 박사만 빼고 말이다.

  하여간 K씨는 내 체질을 수음체질이라고 단정을 지은 후 수음체질에 유익한 음식, 해로운 음식, 주의해야 할 생활태도 등이 적힌 종이를 한 장 주었다. K씨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나 같은 수음체질은 소화기관이 날 때부터 냉하고 무력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음식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아하, 그래서 내가 소화기관에 탈이 잘 나고 손발이 차기도 하고 그랬구나. 이제 내 체질의 약점을 알았으니 보완책만 찾으면 되겠군> 하고 생각했다. 집에 올 때는 삼십 몇만 원짜리 보약도 한 보따리 지어왔다. 당시 서울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비싼 값이었으나 수음체질에 좋은 인삼 등의 귀한 약재를 듬뿍 넣었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지어 왔던 것이다.

  <자, 이제는 내 체질도 알았겠다, 비싼 수음체질용 보약도 지어왔겠다, 섭생에만 주의하면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내 몸이 어떤 지경에 처하게 될지 전혀 모른 채 하여간 보약도 정성들여 다려먹고, 음식도 수음체질에 도움이 되는 닭고기, 고추, 후추, 해조류, 찹쌀 등을 중심으로 먹고, 유해한 음식으로 분류된 돼지고기, 바나나, 참외, 오이, 보리밥 등을 일체 금했다. 과거에 십이지장궤양을 앓은 경험도 있고 해서 특히 비위에 도움이 되는 음식만 골라 먹었다. 차를 마셔도 인삼차, 생강차 등 속을 덥게 하는 것만 마셨다.

  그런데 도무지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스가 배 안에 더 차고 변통도 잘 되지 않아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소화도 잘 안 되고 배 안이 늘 부글부글거리니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특히 밤에 숙면을 못 취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필 소화기관이 약한 수음체질로 태어날 게 뭐람. 소화가 가장 잘 되고 웬만한 음식은 다 먹어도 되는, 수음체질의 반대체질로 태어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당시의 내 심정이었다. 나 자신이 바로 소화기관 쪽을 강하게 타고난 토양체질인 줄도 모르고 푸념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때그때 소화제나 복용하며 속이 거북한 것을 좀 다스려 보려고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토양체질에게는 소화효소제도 해롭다고 한다. 체질의학에 의하면 장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지 강한 쪽이 더 강해지거나 약한 쪽이 더 약해지면 안 된다.

  나는 그 당시 애초에 체질을 잘못 감별해 강한 쪽 장부를 더욱 강하게 하여 몸에 탈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었다.

  1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안 되겠다 싶어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위장, 대장을 모두 X선 촬영해 보았다. 양의학적으로도 내 병의 원인을 알아내 뿌리를 뽑아 버리고 싶어서였다.

  담당의사 소견으로는 위염증세가 약간 있을 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요컨대 신경성 질환인 듯하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보다 더욱 소화도 안 되고 배에 가스는 차기만 하지 빠지지는 않았고 변통 또한 잘 안 되었다. 병원에서 검사해도 이상이 없다 하니 누가 보면 꼭 꾀병 앓는 것 아닌가 하고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하여간 나는 병명도 없는 질환으로 점점 더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몸이 안 좋아질수록 더욱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 운동도 해보고 내 체질에 좋다는 삼계탕, 보신탕, 개소주 등을 수시로 먹었다. 체질은 어쩌다 좀 바뀌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1993년 2학년이 되어 전공 과정이 시작되자 학습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부담이 되었다. 사법시험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여전히 괴로웠다.

  이즈음 배 안에 가스가 차 올라 가슴이 답답하더니 심장이 빨리 뛰는 증세가 생겨서 집 근처 S종합병원에서 일년간 치료를 받았다. 똑같은 약을 일년 가까이 먹었는데, 증세가 호전되는 기미도 없고 혀가 말리는 듯한 부작용도 생겨 약국에 가서 물어보니 병원에서 준 약은 신경안정제와 소화제라고 하였다. 내 병이 어디서 왔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줄기차게 신경안정제와 소화제만 투약한 것이었다.

  1984년, 잘못된 체질식을 한 지도 3년째, 당연한 얘기지만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에 더욱 조심하고 의사의 말에 잘 따른다. 이 해에도 상도동에 있는 모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었다. 그 때 한의사 말씀도 나는 비위가 약한 체질이니 숙지황을 빼고 인삼, 황기 등 비위를 보하는 약재를 많이 넣어 십전대보탕을 먹으면 좋다는 것이었다. 역시 전혀 효과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당시 나는 여러 의학서적이나 건강서적 등을 읽으며 나름대로 내 병에 대해 연구해 보기도 하였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관한 책도 이때 처음 접하게 되었다. 서양의학에서 내게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신경성이니 마음 편히 가질 것>이라는 충고뿐인 것 같았다.

  결국 해결의 열쇠는 <체질치료>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한의사들이 날 잘못 체크한 것이 아닌가 해서 사상의학에 관한 책들을 보고 스스로 날 점검해 봤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화기관을 약하게 타고난 소음인인 것 같았다. 그저 내 체질에 유익하다는 음식과 약재를 섭취해 가면서 한의사분들이 내 체질 중 가장 약하다고 지적하신 비위를 보하며 사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예전처럼 몰아치듯 하지 못했다. 몸살도 자주 났고 감기도 잘 걸렸다. 밤에 잠을 잘 못자니 아침 강의시간은 지각 아니면 결석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받았던 장학금을 학점이 떨어져서 못 받았다. 사법시험은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디 호소할 곳도 없어 답답했다.

  졸업반이었던 1985년에는 집안에 큰 문제가 있었다. 아버님께서 하시던 사업이 크게 잘못되었다. 나와 아버지가 6개월 남짓 여기저기 뛰어다닌 끝에, 안양에 조그만 아파트 하나 살 돈만 건지고 전재산을 날린 채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의 주모자는 감옥에 보냈다.

  이 와중에 나의 몸과 마음은 더욱 지쳤다. 학기 초에 병역 신체검사에서 방위 판정을 받아 놓은 것도 있고 해서 휴학계를 내고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혹시 군대 생활을 하면 몸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군대 생활에선 체질식이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훈련기간에는 세끼 모두 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 가뜩이나 약한 몸에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돼지고기, 오이김치, 보리밥 등은 최대한 피하고 닭고기, 카레 등이 나온 날은 기를 쓰고 먹었다. 방위병인지라 집에서 출퇴근했으니 식생활은 여전히 같았다. 차라리 현역병으로 입대했다면 상황은 바뀌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1986년 말에 제대해 1987년 4학년 2학기에 복학했다. 복학하기 전에 어느 건강잡지 광고를 보고 왕년에 영어강사로 유명하셨던 A씨의 건강강좌에 일주일 코스로 참가했다. 강좌 내용에 공감되는 바도 있고 해서 현미식 중심의 식생활을 하기로 하였다. 수음체질에 좋다고도 하고 배변량도 많아지는 것 같아 1995년에 내가 토양체질임을 알게 될 때까지 계속 현미식을 하였다. 내 몸에 해로운 음식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한 학기만 다니면 졸업이니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2년간의 공백과 내 건강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사법시험은 엄두가 나지 않아 취직을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 친구들이 모두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중에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88년 2월 말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5월에 사법시험 1차에 응시했다.

  짧은 준비기간임에도 고시원 생활을 두 달이나 하는 정성끝에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통상 사법시험 1차는 경쟁율이 20대 1 가까이 되어 불안했던 터라 매우 기뻤다. 하지만 다음 해에 있을 2차 시험이 걱정이었다.

  지난 두 달간의 고시원 생활도 소화와 배설과 수면에, 쉽게 말해 밥, 대변, 잠에 문제가 있던 나에게는 꽤나 고생스러웠다. 고시원 생활 동안에도 체력보충한답시고 닭고기(프라이드 치킨)도 많이 먹고 인삼캡슐과 생강차를 늘 복용했다. 고시원에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삼겹살 등 돼지고기가 나오는 데 그런 날은 고시원에서 식사하지 않고 근처 식당에 가서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사먹었다. 수음체질(소음인)에게는 닭고기, 개고기 등이 보약이니까 말이다.

  사법시험의 2차 준비기간 일년은 집에서 자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체력도 저하되고 뱃속은 더욱 불편했다. 밤잠을 깊이 자지 못할 정도였으니 낮생활에 지장이 많았다. 당시 선후배 다섯 명과 함께 그룹스터디를 하였는데 따라가기도 벅찼다. 내 가방엔 언제나 소화제가 가득했고 생록수라는 드링크형 건위소화제를 매달 두세 박스씩 구입해 두고 마셨다.

  <일년만 버티자!>

  그 해 8월 초 어느 날에는 크게 체했는지 새벽에 토하고 설사하고 난리가 났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그리고 그 병원의 암센터로 보내져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검사받는 동안의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의 불안감은 참기 힘들었다. <혹시 죽을 병은 아닌지......> 검사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 이상은 없고 기능상의 문제인 것 같다는, 요컨대 신경성 질환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몇 달 전에 예약해 두었던 서울 대학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당시 대통령 주치의였던 C박사에게서 진찰을 받았는데 역시 같은 소견이었다. 할 수 없이 소화제가 섞인 약만 2, 3일치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답답했다.(환자인 나는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의사들은 별 이상 없는 것 같다고 하니, 내가 꾀병이라도 피운다는 건가? 수양 부족한 탓인가?)결국 서양의학에서 해답을 구할 수 없고 장부의 허실에 따라 체질을 구분하는 한의학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화기관을 약하게 타고난 수음체질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 체질의 약점을 보충해 가면서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마음먹고 계획도 짜고 보신을 위해 방송에도 자주 나오시는 한의사 L씨를 찾아갔다.

  L씨는 체질에 관한 건강서적들을 비롯해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분이라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갔다. 그분 역시 내 증세와 외모만 보고도 나를 소음인이라고 했다. 덧붙여서(자네같은 소음인은 평생 위장장애로 고생하지. 소음인은 고시에 불리한 체질이니 몸을 보하는 데 특히 유의하게)라며 친절한 충고도 해주었다. 자신에 찬 L씨가 지어준 약을 한아름 받아와서 정성스럽게 다려 먹었다. 또다시 내 몸에 유해 물질을 투입한 꼴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시험공부에 지치다 보니 몸은 더욱 안 좋았다. 듀스파타린, 디세텔등 과민성 대장증후군 치료제도 장복했다. 남들이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하면 그냥 소화가 안 되는 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목욕탕에 간 후배녀석은 <저 몸으로 어떻게 버티나>하는 눈치였다. 남들이 보면 고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몸이 약해졌나 싶었을 것이다. 또 엉덩이 등 몸 군데군데에 종기가 잘 생겼다.

  1989년이 되자 시험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별로 능률적인 공부를 하지 못해 불안했다. 몸이 더욱 처지는 것 같아 청량리의 B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한 제 지어왔다. 역시 거기서도 비위를 보하는 약재 중심으로 지어왔다. B한의사는 소음인 등의 용어는 쓰지 않았으나 내가 소화기관이 약한 체질이라고 했다.

  1989년 7월 사법시험 2차가 국민대학에서 치러졌다. 2차 시험은 4일간에 걸쳐 오전, 오후 각각 1과목씩 8과목이 치러진다. 집이 안양에 있어 시험장 근처 여관에 방을 잡고 4일을 지내기로 했다. 평소에 먹던 소화제, 소음인에게 좋다는 보증익기탕 진액도 준비해 갔다. 어머니께선 정릉에 사는 친척집에 계시면서 현미찹쌀밥을 정성스럽게 마련해 주셨다. 한 마디로 내 체질에 해로운 것들만 가져간 꼴이었다. 지금도 그 때 얘기가 나오면 어머니께선 엉터리 체질 감별사들에게 속았다며 분해하신다.

  시험 기간은  너무 더웠다. 체력은 이미 바닥난지 오래인지라 악으로 버텼다. 마지막 날에는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음식을 전혀 넘길 수가 없었다. 탈진을 막기 위해 이온 음료수를 먹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더 속이 편했다.

  3개월 후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는데 불합격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까닭에 실망이 켰다. 주위에서 다시 하면 꼭 합격할 것이라며 격려했지만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기에 자신이 없었다. 단지 아쉬움과 오기로 재도전하기로 하였다.

  이 때도 안양에서 가장 큰 J한방병원에서 보약을 한 제 지어 먹었고, 그 다음 해에는 L한의원에서 수지침도 맞고 보약도 먹었고 하며 사법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연속 낙방이었다. 심한 패배감과 건강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992년부터는 사법시험을 접어두고, 정확하게 포기하고 학원에서 입시생을 지도하였다. 가르치는 일이 내 성격에도 맞는지 즐겁게 느껴졌다. 돈을 버니까 여유도 생기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다행히도 체질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음식도 먹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법 시험 준비할 때보다는 몸 컨디션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밤에는 취침에 방해될 정도로 배에 가스가 찼고 변통에도 문제가 많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법시험은 못다한 숙제처럼 나를 늘 찜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히 다시 일을 벌이지는 못했다. 단지 아직은 잊지 않았다는 표시로 몇 달 준비해서 1995년 3월에 있는 사법시험 1차에 응시했다. 결과는 뻔했지만 시험장을 나오면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건강문제의 해결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이 있은 지 며칠 후에 사촌여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그 애도 나처럼 변통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배한의원이라는 데 가서 체질검사를 받고 체질침도 맞고 체질식을 했더니 다 나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금음체질이라고 했다. 체질이론을 들어보니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아닌 권도원 박사의 8체질의학에서 쓰는 용어였다. 그래서 사촌 동생에게 물어보니 배한의원 원장인 배철환 박사가 권도원박사의 제자라고 하였다.

  나는 건강서적을 여러 가지 읽은 까닭에 권도원 박사의 이름과 8체질론, 체질침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체질침의 효과가 대단하다고 해서 한번 맞아 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여간 한의원에 간 지도 꽤 되었으니 이제 다시 한번 속아볼 때도 되었다 싶었고, 특히 변통이 시원해졌다는 사촌 동생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즉시 배한의원에 예약하고 일주일 후에 가보았다.

  진료 첫날엔 사람이 많아 오래 기다린 데다가 한의원 위치가 몇 년 전 내가 사법시험에 참패했던 현장인 국민대학교 근처라서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첫 진료부터 다른 한의원과는 달랐다. 먼저 설문지에 과거의 병력, 식생활, 현재의 증세, 성격 등 40여 문항에 걸쳐 답을 써냈다. 차례가 되어 들어가자 배 박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에 양손의 맥을 보고 침을 몇 군데 놓더니 몸의 반응을 살펴서 내일 오라고 했다. 내 체질이 무엇인지를 전혀 언급이 없었다.

  다음날 다시 가서 몸에 별 반응이 없었다고 했더니, 맥진을 한 후 침을 몇 군데 놓고는 이틀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이번엔 속이 좀 편해지면서 졸음이 왔다. 세번째 진료 받으러 가서 몸의 반응을 이야기했더니 양손의 맥을 다시 짚어보시고는 내 체질은 토양체질이라고 하였다.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체질식단표를 주시는데 잘 살펴보니 13년 전 K한의사가 준 식단표와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 아닌가. 아! 이럴 수가! 그때의 내 심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꽤나 복잡한 상태가 되었다. 나는 수음체질이다, 소음인이다 했던 한의사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입에서 욕까지 튀어나왔다. 13년간 어설픈 체질의학의 덫에 걸려 괴로워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울화가 치밀었다.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도 생각했었다.

  얼마나 괴로웠던가?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허비했는가? 정확히 감별하지 못하겠으면 아예 체질을 말해주지 말든지 최소한 정반대의 체질로 감별하지는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은 명색이 한의사인데.

  정말이지 거듭 당부드리건대 한의사 여러분들은 확신이 서지 않는 한 환자에게 무슨 체질이다라고 하거나 무슨무슨 음식 등이 당신 체질에 맞는다, 맞지 않는다 등의 위험한 얘기는 해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몸이 아픈 환자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며 그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는 누가 책임지겠는가?

  배한의원에 한달 남짓 다니면서 체질침도 맞고 약도 먹고 이전과는 완전히 반대 체질식을 하니 몸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13년 만에 먹어보는 보리밥, 오이, 참외, 수박, 돼지고기 등은 정말 맛있었다. 위의 음식들은 수음체질에게는 대단히 해로운 식품이지만 나 같은 토양체질에게는 보약이라고한다.

  체질식을 하면서 따로 치료하지도 않았던 코병이 저절로 나았고 피부도 좋아졌다, 내가 소화제도 딱 끊고 이것저것 잘 먹는 것을 보고는 크고 작은 질환이 있던 주위 친지들이 배철환 박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다. 특히 무릎 관절염으로 다리를 펴기조차 어려우셨던 아버님께서 두 번 다녀오신 후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시는 것을 보고는 나도 깜짝 놀랐다. 8체질의학의 위력은 대단했다. 형수님은 체질감별만 받고 오시기도 했다.

  8체질 의학은 놀라운 의학이다. 체질감별 단계에서부터 이제마의 사상의학에는 없는 맥진법에 의해 정확히 체질을 찾아 낸다. 치료단계에선 체질침이라고 하는 놀라운 효과를 지닌 방법이 사용된다. 특히 체질에 맞는 음식과 섭생법은 세계최초의 이론으로 현재 그 모방자들이 흉내를 많이 내고 있으나 그 창시자는 권도원 박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깝게도 권도원 박사의 8체질의학을 제대로 전수받은 사람이 아직 국내에 수명에 불과해 체질침으로 치료를 할 줄 아는 한의사는 많지 않다고 한다.

  몸소 체험해 본 사람으로서 8체질론과 체질침은 경이적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배 박사 자신도 8체질의학의 창시자이시며 스승이신 권도원 박사를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하시며 그분의 업적에는 노벨상도 가볍다고 하셨다.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8체질의학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하나하나가 놀라운 내용들이다.

  배철환 박사도 체질감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수차 강조하셨다. 실제로도 배 박사는 체질감별이 확실히 되지 않으면 환자를 그냥 돌려보낸다. 나의 이모님도 몇 달에 걸쳐 수차례 내왕끝에 체질을 겨우 알게 되었다. 내 경우처럼 잘못된 체질진단은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배 박사는 강조하신다.

  우리 일반인들도 체질감별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척 보면 압니다>식의 체질감별사들을 주의하자. 정확히 체질감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질식을 한다거나 약을 복용한다거나 하지 말자 위험천만이다. 끝으로 다시 한번 당부드리는데, 일반인이든 한의사든 함부로 체질을 얘기하지 말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8체질건강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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